BMW의 역사 총정리+년도별 정리
간단 정리
BMW는 세단, 컨버터블, SUV, 스포츠카 그리고 모터사이클을 제조 및 판매하는 독일의 자동차 브랜드이다.
1913년 칼 프리드리히 라프(Karl Friedrich Rapp)가 항공기 엔진 제조업체인 라프 모토렌 베르케를 설립해 독일 공군에 엔진을 납품했다.
이후 1916년 경영 위기에 처한 라프 모토렌 베르케를 오스트리아 태생 엔지니어인 프란츠 요세프 포프와 그의 동업자인 막스 프리츠가 인수했고, 이듬해인 1917년 회사 이름을 바이에리셰 모토렌 베르케로 변경했다.
이때부터 바이에리셰 모토렌 베르케는 약자로 BMW로 불리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9년)에서 동맹국의 패배로 독일에서 더는 비행기를 제작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바이에리셰 모토렌 베르케는 항공기 엔진에서 모터사이클로 눈을 돌렸고, 1928년에 자동차 산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BMW가 1972년~1977년 각각 출시한 BMW 3,5,7 시리즈가 세계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세게 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BMW의 시작
BMW의 설립자인 프란츠 요세프 포프는 1886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고,
1901년 가족과 함께 체코로 이사가 그곳에서 그래머 스쿨을 졸업했으며,
1909년 기계공학과 전기공학의 공동 학위를 취득한 후, 그는 빈으로 돌아와 AEG(전자제품 제조업체)에서 기술자로 근무했다.
자동차 회사 설립자들을 보면 대부분 기술사로 근무한 이력이 꼭 한 번씩은 있는 것 같다.
이때 프란츠 요세프 포프는 감독관으로 하청업체인 라프 모토렌 베르케(엔진 제조업체)에 장기 파견되었고, 이곳의 열악한 생산 시스템을 혁신하기 위해 AEG사내 동기인 막스 프리츠를 영입했다.
누가 알았을까 이 두 명이 훗날 BMW의 설립자가 될 것을 말이다.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때 라프 모토렌 베르케가 경영난을 겪게 되자 프란츠 요세프 포프와 막스 프리츠는 경영권을 인수해 이듬해 BMW로 이름을 바꾸었고, 1918년 주식회사로 상장시켰다.
이후 프란츠 요세프 포프의 경영 하에 BMW는 항공기 엔진을 생산해 독일 군대에 납품했다.
이때가 요세프 포프와 프리츠가 BMW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이 속한 동맹국의 패배로 끝나고, 베르사유 조약(전쟁 피해처리에 대한 국제 조약)에 따라 모든 전쟁 패배국이 그렇듯, 독일은 항공기 엔진을 포함한 일체의 무기류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이에 BMW는 항공기 엔진에서 모터사이클로 눈을 돌려 1923년 첫 번째 모델을 출시했다.
이건 BMW의 첫 모터사이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당시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독일 내에서 자동차보다는 모터사이클의 수요가 높았던 데다가, 항공기 엔진 기술을 토대로 만든 BMW의 제품들은 큰 인기를 끌게 됐다.
이후 BMW는 모터사이클 시장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1928년부터 본격적으로 자동차 시장에 진출했다.
이게 바로 그 'BMW'세계적인 기업의 시작이었다.
자동차 산업의 진출 그 이후
1928년
프란츠 요세프 포프의 주도 아래 BMW는 비행기 공장인 아이제나흐를 인수했고, 자동차 제작을 시작했다. BMW는 오스틴(영국의 자동차 업체)사로부터 소형 자동차 모델인 오스틴 세븐의 제작 및 판매권을 사들였다.
1929년
BMW는 오스틴 세븐을 발전시켜 BMW 딕시를 출시했고, 이것이 BMW의 첫 번째 자동차 생산이었다.
이후 BMW는 후속 모델인 딕시 디에이 투를 시작으로 디에이 포까지 연이어 선보였다.
이때 만들어진 차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옛날 차'마차 형태의 차'이다.
1933년
BMW는 6기 통 엔진이 장착된 BMW 303을 출시했다. BMW 303 모델에는 프로펠러 엠블럼, (엠블럼은 자동차 심벌을 말함)과 두 개의 콩팥을 형상화한 키드니 그릴 (그릴은 자동차의 앞쪽 통풍구를 말함)이 처음으로 적용되었고, 이후 이는 BMW의 대표적 상징이 되었다. 1926년에 BMW는 경쟁업체인 다임러-벤츠와 합병을 시도했으나 BMW 303의 출시로 동종업계에 먼저 뛰어든 다임러-벤츠와 경쟁에 돌입함으로써 1933년 양 사간의 합병 계약이 무산되었다.
1936년
BMW는 항공기를 모티브로 유선형으로 디자인된 2인승 레이싱카인 BMW 328을 출시했다.
BMW 328은 강철 프레임을 기반으로 견고한 리어 액슬, 전방 독립식 서스펜션을 장착해 당시 BMW가 가졌던 모든 기술을 집약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1936년~1940년 동안 BMW 328은 172개 경주에 출전하여 141 차례 우승을 거두었으며, 그중 1938년 1000마일을 달리는 이탈리아의 밀레 밀리아 경주에서는 평균 속도 166km/h라는 기록을 세우며 우승해 내구력과 스피드를 인정받았고 이로 인해 BMW는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이때가 BMW의 전성기라고 해도 될 만큼 잘 나갔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 동안 BMW는 레이디얼 엔진인 BMW 132, BMW 801 등을 제작해 독일 공군에 납품했다.
전쟁 후 BMW는 항공기 엔진과 로켓을 생산한다는 이유로 연합국에 의해 3년 동안 생산 금지 명령을 받았고, 이 같은 상황은 BMW에 재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 후 1950년대에 들어 BMW는 자동차 제작을 재기할수 있었다.
이때가 BMW역사상 가장 힘들었었던 시절 중 하나로 분류되기도 한다.
1952년
4 도어 럭셔리 세단인 BMW 501과 BMW 502를 출시했으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독일 상황에 맞지 않아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50년대 중반
BMW는 미국 스포츠카 시장으로 눈을 돌려, 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다임러-벤츠사의 300SL 모델에 대항해 BMW 503과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BMW 507을 발표했다.
이 중 8기 통 엔진과 4단 수동변속기를 탑재한 BMW 507은 최고 출력 150마력, 최고 속도 227km/h를 발휘하는 당시 최고급 모델이었고, 엘비스 프레슬리 등 유명인들이 구매한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높은 가격대로 대중들에게는 외면받았다.
한마디로 성능은 매우 좋았으나 가격이 높아 보통사람들은 사지 못하는 그림의 떡이었거, 최상위 부유층들만이 이를 구매할 수 있었던, 그 시대 최고의 최고급 럭셔리 자동차였다.
이후 그 비싼 차를 아무도 사지 않자 BMW는 전쟁 후 독일의 힘든 경제 상황에 맞추어 보급형 콤팩트 차량인 BMW 700을 제작했다.
BMW 700은 모노코크(Monocoque, 일체형 프레임 차량 구조)와 후방 엔진 구조가 특징적이었으며, 세단, 쿠페, 컨버터블 총 3종류로 출시되었다.
BMW 700은 출시 전부터 1만 5천 대의 주문이 이어졌으며, 1965년 생산이 종료될 때까지 총 18만 1천 대가 판매되었다.
1959년
BMW의 대주주가 된 '헤르베르트 콴트' BMW 700의 초기 선전에도 불구하고 BMW는 재정난으로 1959년 파산위기에 놓였고, BMW의 경영진은 회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당시 인수합병을 제안해온 다임러-벤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BMW의 로고는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주주들의 공통된 의견과 함께 BMW가 다임러-벤츠의 하청업체로 전락하는 것을 반대하는 일부 주주들의 의견으로 이는 무산되었다.
이후 BMW의 주주 중 한 사람이었던 독일인 산업가 헤르베르트 콴트가 BMW의 나머지 주식을 모두 사들이면서 BMW는 독립회사로 존속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헤르베르트 콴트는 BMW의 가치를 호소하는 프레젠테이션에 크게 감동하여 이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돈이 얼마나 많으면 감동받아서 한 회사의 주식을 다 살 수 있는지 또한 궁금할 뿐이다.
1960년
헤르베르트 콴트는 BMW의 매출 촉진을 위해, 다임러-벤츠에 있던 파울 한네만을 BMW의 판매이사로 영입했다.
1961년
이후 헤르베르트 콴트는 1961년에 프랑크푸르트 오토쇼 IAA에서 큰 호응을 얻은 스포츠 세단인 BMW 1500의 잠재력을 인식했고, 그 해 ‘BMW 뉴 클래스’ 시리즈의 첫 번째 모델로 이를 시장에 출시했다.
이때 뉴 클래스의 의미는 BMW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양산하지 않았던 1,500cc~2,000cc(준중형) 엔진 차량이라는 의미였다.
이때 파울 한네만은 BMW 1500을 경쟁업체인 , 오펠 등의 차량보다 월등히 높은 가격을 매겼다.
하지만 고객들은 이 가격대를 BMW 1500이 제공하는 스포츠 이미지, 혁신적인 디자인 그리고 품질의 결합 등에 대한 정당한 지급이라고 받아들였다.
평상시에 BMW가 얼마나 제품을 잘 만들고 콘셉트를 잘 유지했는지가 이 부분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1963년
BMW 1500의 후속 모델인 BMW 1800이 시장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고, 이후 BMW는 BMW 2000C, BMW 2000CS라는 프리미엄 라인과 BMW 1600-2라는 저가 모델을 연이어 출시했다.
이를 통해 1964년 BMW는 전년 매출 대비 47%의 성장세를 보였고, 1950년대의 심각한 재정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불어 BMW가 스포츠 세단을 만드는 자동차 브랜드라는 인식을 대중들에게 얻을 수 있었다.
이로서 BMW의 새로운 제2의 전성기의 시대가 다시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1970년
콴트 그룹에 있던 에버하르트 본 쿠엔하임이 BMW의 새로운 CEO로 취임했고, 또한 에버하르트 본 쿠엔하임의 지휘 아래 BMW는 차량을 시리즈 단위로 정비했다.
1972년
또한 1970년의 시리즈 단위로 정비한 것을 기반으로 ‘BMW 5 시리즈'를 출시했다.
1974년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엔진 효율성에 대한 소비자 니즈가 높아지자, BMW는 연료 효율성을 강조한 콤팩트 차량인 3 시리즈를 선보였다.
당시 BMW 3 시리즈는 전체 BMW 매출의 60%를 웃돌며 대표 상품 라인으로 자리 잡았다.
이로서 새로운 BMW의 시대가 새로이 시작된 것이었다.
1977년~1993년
BMW는 1977년 경쟁업체인 다임러-벤츠의 럭셔리 대형 라인인 ‘벤츠 S 클래스'에 대항해 BMW 7 시리즈를 출시했다.
BMW의 첫 번째 대형 라인인 BMW 7 시리즈에는 최초의 전자식 속도계, 속도 감지형 파워 스티어링, 전자식 외곽 미러, 체크 컨트롤 등의 최신 기술이 접목된 장치들을 탑재했다.
1세대가 생산 중단된 1986년까지 BMW 7 시리즈는 약 28만 대 이상이 판매되었다.
에버하르트 본 쿠엔하임의 지휘 아래 BMW는 새로운 시리즈의 차량 출시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했다.
1973년에는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1975년에는 북미, 1976년에는 스위스 소비자들도 BMW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어 1978년에는 영국에 진출했으며 1981년에는 일본에서도 판매를 개시했다.
BMW는 세계시장의 여러 경제 위기 속에서도 역동적인 성장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2번의 오일쇼크를 겪었지만, BMW의 생산량은 약 4배까지 증가했고, 매출액은 1969년 14억 마르크에서 1993년 290억 마르크로 20배가량 증가했다.
역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여러 유명 자동차 회사들은 다 이유가 있다.
저마다 각각의 어려움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지혜롭게 해결하였기에 지금의 회사가 있는 것이다.
1994년~1998년
1990년대 초반 미국의 경제 불황과 함께 걸프전쟁으로 기름값이 폭등하면서, BMW를 포함한 자동차 산업 전체는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자동차 업계에서는 인수합병을 통해 기업 규모를 확장해 생산 원가를 절감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93년 BMW의 새로운 CEO로 취임한 베른트 피 세츠 리더는 기업 확장을 위해 1994년 미니, 랜드로버, 재규어 등을 보유한 로버 그룹을 인수했고, 1998년에는 롤스로이스 사를 인수해 영국 웨스트서식스 주 굿우드에 롤스로이스 전용 공장을 신설했다.
이제 복 격적으로 회사의 덩치를 불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2000년~2003년
불경기에 따른 영국 정부의 규제 강화로 외국기업인 BMW가 로버 그룹을 원활히 운영하기 어려웠고, 당시 일본 자동차 업체 혼다사, 도요타의 급성장으로 BMW는 2000년대 초 경영난에 봉착했다.
결국, BMW는 2000년 로버 그룹 중 미니사만 남기고 랜드로버는 포드사에, 나머지 로버는 피닉스 컨소시엄에 각각 매각시켰다.
이로써 BMW 그룹은 BMW, 미니 그리고 롤스로이스의 3가지 브랜드만 보유하게 되었다.
연이은 적자 운영에 책임을 지고 2002년 베른트 피 세츠 리더가 하차하고, 그 공석을 BMW의 내부인사인 헬무트 판케가 맡게 되었다.
그는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맥킨지&컴퍼니를 거쳐 1982년 R&D 부서의 총괄 매니저로 BMW에 합류했다.
이후 헬무트 판케가 이끄는 BMW는 2003년 알루미늄 바디와 액티브 프런트 스티어링을 적용한 신형 BMW 5 시리즈를 선보였고, 이 모델은 이듬해 2003년 봄에 독일을 시작으로 세계 시장에 출시됐다.
결국 BMW는 몇몇 브랜드를 제외하고선 전부 매각하여 그 몇몇의 브랜드에 더욱이 집중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2006년~현재
헬무트 판케의 정년 퇴임 이후, 노르베르트 라이트호퍼가 BMW의 새로운 CEO로 취임했다.
그는 1987년 BMW에 합류해 생산과 개발 등의 부서를 두루 거쳤고 2000년 초까지 미국 생산부문 사장을 역임했다.
그의 지휘 하에 BMW는 2013년 11월 처음으로 전기 자동차 BMW i3를 출시했다.
이 모델은 탄소섬유로 제작되어 차체가 가볍고 연료 효율성이 뛰어나며, 출시 전 1만 대의 주문을 받을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지금까지의 기나긴 여정을 거쳐서야 드디어 우리가 아는 그 대중적인 BMW가 이때서야 비소로 완성된 것이었다.